Chapter 99
1.
트리니티는 굉장히 귀족스러운 학원이다.
‘귀족’이라고 하면 무엇이 먼저 떠오르는가.
고풍스럽다? 교양이 넘친다?
취미로 꽃을 가꾸며, 말투가 고아하고, 예의범절을 갖추어 행동하는 모습?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며, 종교적 가치관을 따라 정의와 질서를 추구하는 면모? 선과 악을 구분하고,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미덕을 실천하는 모습?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트리니티의 가장 귀족스러운 모습이라고 한다면 단언컨대 ‘정치’를 말할 것이다.
정치(政治). 나라, 혹은 집단을 다스리는 일.
오래 전부터 ‘정치’란 지성인들의 전유물이었다.
보다 정확히는, 고위 계층만이 독점할 수 있는 소유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부족 사회를 형성했던 초기 문명에선 오래 살아남은 고령자가 부족을 이끌고, 국가의 개념이 탄생한 직후론 귀족이라 불리는 상위 계층이, 이후 현대 문명에 이르러서는 국회의원과 대통령, 그 외의 수많은 고위 계층의 인물들이 독점하였다.
트리니티는 이러한 ‘정치적 특성’이 아주 잘 발달되어 있는 학원이었다.
트리니티의 양면적인 특징의 영향인지, 혹은 삼두정 체제로 형성된 트리니티의 환경이 원인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트리니티는 키보토스의 그 어떤 학원보다 더욱 정치에 진심인 학원이었다.
게헨나의 대부분 학생들이 지니는 특성인 정치적 무관심과 대비될 정도로 말이다.
트리니티의 학생회 역할을 수행하는 티파티.
티파티의 정치적 입지를 지지하는 트리니티 각 분파.
그런 티파티 산하의 수많은 기관들.
각자의 입장과 신념, 그리고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트리니티의 정치 환경은 그야말로 복잡하고 음험한 야생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이유들 탓에 트리니티는 도리어 다른 학원들보다도 더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정세를 띨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트리니티의 정체 체계인 삼두정치 체제가 소명하는 바는 본디 ‘상호 간의 보완 및 견제’다.
하나의 분파가 독재를 행사하는 것을 견제하고, 협력하여 트리니티를 이끄는 것이 그 목표인 셈이다.
다만, 이러한 삼두정치 체제의 가장 큰 결점이라고 한다면- 중요한 순간에 의견이 갈릴 시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파벌 싸움으로 그 본질이 와전되어 실질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트리니티의 상황이 그러했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함께 해결하기보단 정치적 이점과 위험만을 판단하여 ‘정치적으로’ 행동하니까.
실제로 현장에서 뛸 일이 없는 만큼, 한발짝 뒤에 서서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이익과 손해를 가늠해 마땅한 결론을 지어 명령을 내린다.
전생에 살던 정치인들과는 달리 탁상행정을 시행하는 일은 그다지 없으나, 그들이 온전히 실무적인 명령만을 내리고 있다곤 볼 수 없는 것이다.
하여, 실로 귀족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겉으로 트리니티가 평화로워보이고 얌전해보이는 것은 이러한 정치적인 입장 탓도 어느 정도는 있다. 직접적인 무력 충돌보다는 물밑에서 벌어지는 권모술수가 더 많은 학원이었기에.
다만, 그러한 귀족식 마인드가 장착되어 있는 트리니티의 학생들도 쉬이 판단할 수 없는 상황은 언제나 존재했으니.
바로 지금과 같은 상황이 그러했다.
“실크가, 저희 자치구에……?”
티파티 임원이 소식을 전달하자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소녀의 표정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그 내용이 몹시 불편하다는 심기를 감추지 않고 서늘한 기세를 드러내는 소녀. 그녀의 앞에 선 티파티 임원은 몸을 떨며 식은땀을 흘려야만 했다.
왜냐하면.
임원의 눈앞, 상석에 앉아 업무를 수행하는 소녀는 일개 학생이 아닌 티파티의 호스트. 실질적인 트리니티의 학생회장인 ‘키리후지 나기사’였으니까.
서류에서 시선을 떼며 고개를 들어올리는 나기사.
그녀의 베이지색 머리칼이 찰랑이더니 나기사의 단아한 미모를 드러냈다.
다만, 그러한 미모와 달리 표정은 마치 분노라도 한 것마냥 일그러져 있었는데 그 기세가 실로 악귀와도 같았다.
소식을 전달하러 온 임원은 최선을 다해 몸이 움찔거리는 것을 억누르곤 평온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네. 방금 확인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의실현부가 현장으로 출동했습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나가보세요.”
이 자리에 나기사의 친구인 어떤 소녀가 있었다면 너무 차갑다며 태클을 걸 정도의 차가운 말투로 축객령이 내려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식을 전달한 임원은 이런 축객령이 기껍다는 듯 그저 고개만을 숙이며 집무실을 빠르게 빠져나올 뿐이었다.
얼마 전부터 나기사의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진 것은 곁에서 나기사를 지켜본 티파티의 대부분이 아는 사실이었고, 그렇기에 최근 그녀의 집무실에 들어서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많았다.
방금 소식을 전달한 임원도 그 중 하나였다.
“…….”
임원이 빠져나간 것을 확인한 나기사는 날카롭게 반응한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한편, 극심한 피곤함을 느끼며 미간을 문질러야만 했다.
끼익. 의자에 몸을 기대며 천장을 올려다본 나기사가 낮게 중얼거렸다.
“후우. 참 공교로운 타이밍에 오셨군요…….”
나기사는 마른 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뱉었다.
방금 전달받은 상황은 그녀에게 기꺼우면서도 동시에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추가 요소였으니.
“…….”
실크가 트리니티에 도착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라 생각했기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다만 나기사는 현재 상황에서 실크에게 신경을 쏟을 여유가 전혀 없었다. 지금 자신은 트리니티를 ‘관리’하는 데에만 집중해도 머리가 깨질 지경이었기에.
…….
“…하.”
관리라. 그 단어에 피식 웃음에 새어나왔다.
어쩌면 자신은 이미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이미 트리니티는 위기에 봉착했고, 자신이 지금 행하는 것은 모두… 그저 위험을 덮고, 덜어내는 것에 그칠지도 모르는 일이다.
본질적인 위험은 아직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해치울 방법도, 지혜도 없었다.
오직 자신만이 남았다.
절망적인 상황. 그 무엇도 믿을 수 없는 고독함 속에서 자신은 이 위기를 해쳐나가야만 했다.
그런 생각이 고개를 들자 나기사의 눈빛은 더욱 탁해져 음울한 기색을 띠기 시작하였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어요.”
나기사 그녀는 트리니티 티파티의 호스트.
트리니티 종합 학원의 학생회장이나 다름 없는 자.
모두의 위에 서 있는 만인지상의 자리인 만큼 트리니티를 반드시 지켜내야만 하는 책임이 있었다.
그렇기에.
“실크…….”
이젠 시민들에게 ‘희망의 상징’이라 불리우는 영웅의 이름이 나기사의 입안에서 맴돌았다.
“그녀를 믿어도 괜찮은 걸까요.”
에덴 조약을 앞두고 트리니티의 상황은 기이한 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호스트의 자리에 위치한 나기사는 알 수 있었다.
현재의 트리니티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각 파벌들의 움직임도. 자신의 친우의 행적도.
그리고 들려오는 소문마저도.
‘단순히 본다면 별 의미 없는 의심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왠지 알 수 없는 불길함이 느껴져요.’
모든걸 위에서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는 만큼,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지금의 트리니티는 비유하자면 시한폭탄이 설치된 선로 위로 돌진하는 폭주기관차와 같았다.
파편처럼 나뉘어진 의심스러운 행적들과 불안감.
그 모든게 모여 나기사에게 의심의 씨앗을 심었다.
원작에서 그녀가 ‘의심암귀’에 빠지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저것이었다.
어쩌면, 이는 그동안 트리니티를 통치해온 그녀였기에 깨달을 수 있었던 정치적인 본능일지도 모른다.
트리니티의 붕괴, 혹은 그에 비견되는 사건의 발생.
나기사는 이때부터 트리니티에 발생할 재앙을 직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여, 그녀는 실크의 등장에 저도 모르게 희망이라는 감정을 품게 된 것이다.
그녀라면, 자신의 이 불안감을 해소해줄 수 있을까.
자신을 이 절망스런 감정에서 끄집어내 희망으로 끌고갈 수 있을까.
“당신이라면, 가능한가요.”
나기사는 실크를 온전히 신뢰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공교로운 타이밍에 찾아온 실크에게, 어떠한 의도가 있지는 않은지 의심할 정도였다.
다만,
의심과 기대는 다른 법이었다.
만약, 실크가 트리니티의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면.
모두를 구원할 수 있는 영웅이라면.
그럴 힘이 있는 존재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저는, 당신을 이용해서라도 트리니티를 구할 것입니다.”
그게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자, 책임이니까.
트리니티를, 모두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짓이라도 할 것이다.
본디 귀족이라면 그것이 가능해야만 했으니까.
“저를 욕해도 상관없습니다.”
악역이 되어서라도.
실크의 정의에 반하는 짓을 저질러서라도.
“그것이, 제 역할이니까요.”
나기사는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으로 그리 선언했다.
어느새 음울함에서 벗어나 다시 서늘한 기세를 흘리기 시작한 나기사의 눈빛이 창밖을 향했다.
창 밖에는 어느새 차가운 빗물이 주륵주륵 쏟아지고 있었다.
2.
트리니티에 찾아온 이유를 상기한다.
나의 심마(心魔)를, 그리고 의문 한 가지를 해결하기 위해 트리니티의 예언자인 ‘유리조노 세이아’를 찾으러 온 것.
그녀에게 예언 능력을 써달라거나 혹은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답을 구할 생각이었다.
겸사겸사 에덴 조약 사태도 방비하고 말이다.
다만, 나의 이 방법론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목표인 세이아의 위치를 모른다는 것.
애시당초 게임에선 캐릭터의 거주지나 위치를 따로 서술하지 않기에 사실상 나는 맨땅에서 세이아의 위치를 찾는 수밖에 없었다.
베리타스와 히마리 선배에게 부탁했지만, 그녀들도 마땅한 방법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그리고 둘째. 이게 가장 큰 문제였다.
‘벌써 아즈사한테 공격당한건 아니겠지……?’
세이아가 현 시점, 정상적인 상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
내가 트리니티로 출발하기로 마음 먹은 계기는 세이아였지만, 정작 그 세이아가 메인스토리 챕터 3, ‘에덴 조약’ 편 이전에 피습을 당한다는게 문제였다.
세이아가 피습당하는 것 자체가 에덴 조약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불화의 원흉이며, 모든 재앙의 시발점이나 다름 없는 사건이기에.
‘막을 수 있으면 막고 싶은데.’
다만, 그녀가 피습을 당하는 시점이 언제인지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황.
만약 현 시점에서 이미 아즈사- 세이아를 피습하는 트리니티의 스파이에게 피습을 당했다면 자신이 계획한 세이아와의 담론은 물 건너가는 것이었다.
‘그럼 진짜 망하는데…….’
세이아는 피습을 당하는 과정에서 죽지는 않으나, 내가 알기론 이 일을 계기로 에덴 조약 스토리의 후반부까지 식물인간 상태인 것으로 알았다.
정확히는, 그녀가 꿈 속 영역에 숨어들어 현실로 빠져나오지 않는 것이라 표현해야겠지만.
그녀를 꿈 속에서 빼내올 방법이 없는 이상, 내가 그녀와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은 오로지 피습을 당하기 이전 상황이어야만 했다.
“그나마 희망적인건 현 시점이 아즈사가 위장 전입을 한지 며칠이 안된 시점이라는 건가…….”
현재 날짜는 3월 중순.
메인스토리 챕터 2를 앞두고 있고, 챕터 3의 시작까지는 몇 달 정도를 남겨놓은 시점.
나는 고민했다.
과연 아즈사는 어느 시기에 세이아 피습 사건을 벌일 것인가.
그리고, 세이아는 현재 어디에 있을 것인가.
나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거리를 걸었다.
어느새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한 거리에는 이젠 버스킹을 하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검고 흰 원형 우산을 펼치고 걷는 사람들로 가득해졌다.
나는 실크의 차림을 한 채로 주변 편의점에서 사온 우산을 펼치며 주변을 구경했다.
물론, 정확히는 구경이 아닌 초감각을 넓게 퍼뜨려 최대한 정보를 모으는 행위였지만 다른 이들의 시선엔 실크가 우산쓰고 산책하는 걸로 보이리라.
찰박찰박-
쏴아아아-
웅성웅성-
참으로 다양한 정보들이 귓가에 잡혔다.
대부분이 쓸데없고 불필요한 정보들이었지만 이전과 달리 나는 평온하게 정보들을 걸러서 들었다.
‘뭔가, 전에 초감각을 한계 이상으로 사용한 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의 한계가 확장된 느낌이야.’
전에는 이 정도로 초감각을 넓게 사용했을 때 쌓이는 정보에 두통이 저절로 느껴졌는데.
지금은 그럭저럭 견딜만한 수준이었다.
물론, 시간이 길어질수록 두통이 찡하고 오는건 여전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몇십분간 거리를 걸으며 정보를 수집하였으나 마땅한 수확은 없었다.
‘……그만둘까?’
아니. 조금만 더 해보자.
나는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어느 한 버스 정류장에 앉아 눈을 감고 초감각을 더욱 강하게 발동했다.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은 세이아의 위치와 같은 직접적인 정보가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건 길거리에서 얻을 수 있을만한 정보가 아니었기에.
내가 바라는 것은-
‘트리니티의 현황, 그리고… 흔적.’
한 도시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일들을 머릿속에 담아 트리니티가 어떤 상태인지,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순식간에 파악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세이아의 상태를 추론할 수 있는 아주 작은 흔적이라도 잡을 수 있다면 좋다.
삐이이이──.
초감각이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정보를 삼켜내기 시작한 시점, 어느새 귓가에는 찢어질 듯한 이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나아가 모든 정보를 담았다.
쌓고, 쌓고, 또 쌓는다.
그렇게 내 머릿속에 정보의 탑이 점차 쌓여갔다.
그 정보는 모두 소리와 문장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모든 소리를 이해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대화에 담긴 감정을 읽고 문장을 캐낼 뿐.
치지지직—-
아득한 문장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어지러울 정도로 무수한 소리와 기척이 감각에 담기며 흩어지길 수없이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내 머릿속에 남는건 문장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몇 가지의 문장들 뿐.
한 차례, 한계를 넘어선 초감각은 이제 그야말로 초월적인 영역에서 다루는 것이 가능해졌다.
‘초월(超越)’이란 단어는 말로 설명하기 참 어려운 비유법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순간, 초감각의 초월을 몸소 체험하며 단어의 뜻을 이해하였다.
정보를 삼킨다. 문장을 뽑아낸다. 그리고 담는다.
내가 원하는 하나의 정보를 위해, 짧은 순간에 쌓아올린 정보의 탑의 모든 것을 압축시킨다.
이는 간단하게 말하면 요약이었고, 더욱 복잡하게 말하면 아득한 정보를 통찰해낸 결과였다.
사람의 감각을 느끼는 것을 넘어, 다루는 것.
이것이 초감각의 또 다른 성장이었다.
이내, 내 머릿속에는 세 개의 문장이 담겼다.
– [“키리후지 나기사의 변화. 예민해진 성격.”]
– [“에덴 조약을 반대하는 목소리의 증가했다.”]
– [“티파티의 행적을 파악할 수 없다.”]
세 문장으로 트리니티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직감적인 깨달음이 나를 안심시키는 한편, 동시에 위기감을 마음 속에 심어넣었다.
아무래도 남은 시간이 별로 없는 듯했다.
보다 정확히는, 세이아와 미카그리고 나기사, 세 사람 간의 균열이 점차 늘어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직감적으로.
‘그렇다면, 빨리 움직여야겠어.’
안그래도 메인스토리 챕터 2의 시작도 며칠 남아있지 않은 시점.
이곳에서 원하는 바를 빠르게 이루고 돌아가야 할 듯 싶었다.
“후우우…….”
그렇게 몇 분간 이어나가던 집중을 끊어낸 직후, 어느새 숨을 참고 있었는지 거칠게 숨이 내뱉어졌다.
생각의 정리가 끝났으니, 이제 움직일 시간이다.
이내 천천히 심호흡하며 눈을 뜬 순간.
“…허.”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왜냐하면-
“이야~ 잘 주무셨슴까? 아니면, 생각의 정리는 끝나셨나?”
“……많이도 왔군.”
“당연한거 아님까. 당신의 강함은 모두가 알고 있슴다. 그러니 최대한 많이 데리고 왔슴다.”
검은 머리카락. 검은 제복. 붉은 무늬.
새빨간 헤일로를 지닌 학생들.
트리니티의 선도부 역할을 하는 동아리.
‘정의실현부’의 학생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기에.
3.
나는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물러나달라고 부탁하면, 들어줄 생각인가?”
“으음… 이유를 들어보고 결정하겠슴다.”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저희도 물러날 수 없슴다.”
하하.
우리는 서로 바라보며 웃었다.
나와 대화를 나누는 상대방- ‘나카마사 이치카’의 눈동자가 드러나지 않는 실눈이 곡선을 그렸다.
다만, 초감각이 알려주고 있었다.
눈앞의 이 소녀가 그저 허허롭게 웃는게 아닌 신경을 온전히 내게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관심이 너무 많아도 피곤하군.”
“그야 당신은 영웅이잖슴까.”
“…….”
그녀 뿐만이 아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정의실현부의 부원들.
그리고 저 멀리서 느껴지는 누군가의 기세까지.
모든 것들이 나를 향해있었다.
마치, 당장이라도 나와 싸우겠다는 듯이.
‘…아니군. 그냥 시늉일 뿐인가.’
이치카는 나를 두고 영웅이라 하였다.
그런데 어째서, 이들은 왜 나와 싸우고자 하는가.
부원들의 눈빛에 담긴 나에 대한 호의를 감출 생각도 없이, 왜 그들은 내게 총구를 겨누는가.
머릿속에 의문이 맴돌았지만 답은 곧장 나왔다.
“또 그놈의 정치인가?”
“…….”
“쯧. 하여간 맘에 안드는구나.”
이치카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침묵에서 이미 대답을 얻었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할 일도 간단하지.
“흐. 무서워서 도망이나 가야겠어.”
“……그렇슴까?”
“수가 너무 많잖아. 안 그래?”
“좀 많기는 함다. 많이 데려온 보람이 있네요.”
“그래. 너무 많다. 그러니 쫓아오든 말든 알아서 해라. 난 갈테니까.”
피식.
그 순간, 이치카의 감겨있던 눈이 뜨이고 그녀의 회백색 눈동자가 내게로 향했다.
“…감사함다.”
“별 말씀을.”
“하하…….”
그것으로 우리의 대화는 끝이었다.
쿠웅-!
나는 지면을 강하게 박차며 하늘로 치솟았다.
내 갑작스런 행동에 깜짝 놀란 정의실현부 멤버들이 입을 쩍 벌리며 날 올려다보는게 보였다.
심지어 이치카마저도.
촤악─!
여전히 주변 건물에서 느껴지는 막강한 기세를 경계하며 나는 건물로 거미줄을 발사했다.
이 정도의 기세라면 정의실현부엔 한 명 뿐이겠지.
나는 피식 웃으며 하늘을 날았다.
4.
“……저게 사람이 가능한검까?”
이치카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모두가 동의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감상이 절로 흐를만큼 말도 안되는 광경이었다.
사람이 하늘을 날았다. 그것도 맨몸으로.
이후에는 거미줄을 발사하긴 했지만, 방금 하늘로 도약한 순간의 힘은 도저히 상식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생각하심까, 선배?”
그리고 이내, 주변 건물에서 숨어있던 한 소녀가 몸을 비척거리며 거리로 걸어나왔다.
철퍽-
철퍽-
그녀가 기괴한 걸음걸이로 걸을 때마다 물 웅덩이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튀었다.
걸음이 이어지며 소녀가 부원을 지나칠 때마다 ‘히익!’ 하며 들려오는 공포에 질리는 소리들.
매번 마주하는 인물이지만 적응이 안되었는지 여전히 소리는 끊이지 않고 울려퍼졌다.
이치카는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쓴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츠루기 선배.”
“큭큭… 크크큭… 크흐흐헤헤헤헤………!!”
“……많이 신나셨슴다.”
“키힛… 키히히히힛……,”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뱉는 소녀.
하지만 이치카는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이야~ 이 정도로 선배의 흥미를 끄는 사람은 오랜만이지 말임다. 다음번에 또 만나고 싶지 않으심까?”
“크흐흐흐… 게헤헤헤헤헤헷…….”
“오. 역시 선배도 그렇게 생각하심까?”
오로지 기괴한 대답으로만 이치카와 대화를 이어나가는 소녀의 이름은 ‘켄자키 츠루기’.
무려, 정의실현부의 부장으로 있는 인물이었다.
기본적인 외형은 정의실현부의 모두가 그렇듯 검은 머리에 검은 제복, 그리고 붉은 헤일로를 지녔다는 점이다.
그리고 아주 작은 특이사항이 있다면.
얼굴이 조금 무섭고, 제복 앞쪽이 피에 젖은 듯한 모양새를 하고 있고, 말을 잘 못한다는 점일까.
‘으음. 조금… 은 아니지만 말임다.’
츠루기의 저 살벌한 얼굴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정신 공격을 가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담이 크거나, 익숙해지지 않는다면 얼굴을 보고 기절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사소한 결점들은 츠루기의 모든걸 설명할 수 없는 법이다.
이래보여도 츠루기는 키보토스의 최강자를 논할 때 절대로 빠지지않는 트리니티의 강자였으니.
“아, 아……….”
그 순간.
기괴한 ‘소음’만 내뱉던 츠루기의 입에서 사람의 말이라고 할 법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쉽지, 않겠어…….”
“……?!”
그 말에 이치카는 감고있던 두 눈을 순간적으로 뜰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엇이 쉽지 않은지는 알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츠루기가 한 말을 이해하였기에.
“…하하.”
알 수 없는 전율을 느끼며, 이치카는 그리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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